미국의 성장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상승곡선을 그렸지만 성장이 시작된 시기는 1800년대 후반이다. 따라서1800년 이후 미국이 어떻게 국가와 개인의 부를 증대하고 패권국가가 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00년대 후반 미국 경제성장의 두 축은 철도와 철강이었다.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철도가 민간자본에 의해 건설되었고, 철도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원자재인 철강 사업 역시 큰 수혜를 입게 된다.
이후 전국에 깔린 철도를 활용해 물자를 빠르게 운송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한다. 미국은 1차, 2차 세계대전 덕분에 영국을 제치고 패권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것을 계기로 유럽 전역으로 퍼진 전쟁의 불길은 유럽의 곡물 수확량이 감소하면서 미국의 농산물 수입 요청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독일의 잠수함이 발트해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흑해를 통한 러시아의 곡물 수출이 중단되었다.
유럽의 식량 생산 감소와 대규모 공급처의 폐쇄로 미국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였고 미국 농가의 수입은 전쟁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였다. 농업 외에 제조업의 성장도 눈 부셨다.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과 자동차, 철도 건설 자재 등 유럽 전역에서 주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철강 제조업체이자 조선업체인 베들레헴 철강은 계약 금액이 전쟁 이전 대비 10배 이상 급증하였고, 이 회사의 주가는 1915년에만 약 10배 이상 상승하였다. 이처럼 농업, 제조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의 실적이 급증하자 주식시장도 가파르게 상승하며 국가와 기업, 개인은 엄청난 속도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한편, 전쟁이 소모적 교착상태에 접어들면서 유럽 국가들의 재정상황이 악화되자 유럽의 금융자산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넘치는 유동성은 미국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렸고, 월 스트리트는 넘치는 이익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넘치는 돈으로 유동성이 풍부해진 미국 기업들은 부족한 군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급히 매각하는 기업을 매입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 취득한 유럽의 자산을 이용하여 산업 기간망이 붕괴된 유럽의 인프라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막대한 이익을 거둔다.
이처럼 제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경제적 지위를 완전히 바꾸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유럽 국가에 채무를 갚아 나가던 빚쟁이 나라에서 전쟁 후에는 유럽 국가의 최대 채권국으로 변신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국가들은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고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패전국인 독일을 거세게 압박하였다. 미국은 독일의 재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에 반대하였지만, 독일에 대한 원한이 강했던 유럽 국가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결정은 독일 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이는 나치즘의 탄생으로 이어져 2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된다.
독일의 전쟁 야욕이 드러나기 전, 유럽 국가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비하였다. 미국에서의 수입을 늘려 대규모 군수물자를 준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향으로 미국의 경제는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의 막바지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두 차례의 뉴딜 정책으로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실업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시민들의 잠재되었던 욕구가 분출되기 시작한다.
1946년 전시 통제가 해제되자마자 시작된 소비 열풍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재화 가격 상승에 비례해 기업의 실적도 꾸준히 개선되었다. 그러나 기존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와 빚 뿐이었던 반면 미국의 국토와 산업 시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 미국은 유럽 국가의 인프라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전 세계 총 생산량의 50%를 차지할 만큼 거대했고, 전 세계 금의 70%를 미국이 보유하고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 이후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미국의 시대 즉,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되었고 미국의 통화인 달러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확보한다.
1944년 7월 수많은 경제 전문가와 고위 관료가 미국 뉴햄프셔 주에 위치한 ‘브레턴우즈’에 전후 진행될 새로운 국제 무역과 금융 체제를 만들기 위해 몰려들었다. 구 패권국가 영국 대표인 케인스는 ‘방코르(Bancor)’라 부르는 새로운 국제 통화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방코르에 대해 변동성이 거의 없는 고정환율로 설정하여 각국의 화폐와 연동시키자고 제안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금본위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통화체계 주장이었다.
반면, 미국 대표는 미국이 전 세계 금 보유량의 7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금과 연계할 수 있는 달러가 새로운 기축통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대표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이후 무역 거래는 달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제도는 금본위제가 아닌 ‘달러-금환본위제(gold dollar standard system)’로 불렸는데, 모든 국가는 보유한 달러를 미국의 은행에서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모든 국가들은 금을 얻기 위해 달러를 구입해야 했고, 이는 전 세계 국가들의 주요 수출 국가가 미국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였다.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 미국은 세계의 통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동성을 풍부하게 공급해야만 했다. 미국은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각 나라의 상품을 수입하고 달러로 결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진행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미국이 자유무역을 중시하게 된 배경이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후 미국은 전 세계가 생산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시장이었고 만약 미국의 소비시장이 주춤하게 되면 외국 상품의 수입이 줄어들고, 해당 국가의 달러 수입은 감소하여 경기가 침체하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달러가 안정적으로 전 세계로 퍼져 나가야 했고, 달러를 계속해서 발행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경제가 지속 성장해야만 했다.
또한, 각 국가들은 미국에 수출하고 받은 달러를 금고에 외환보유고라는 이름으로 보관하였다. 이들 국가의 외환보유고는 다시 미국의 채권을 구입하는 데 쓰였고, 이와 같은 ‘달러 리사이클링’은 미국에 무역적자가 발생하더라도 달러 가치가 하락하거나 외환이 부족해 생기는 위기를 방지하였다.
즉, 미국의 핵심 수출품은 달러였다. 그러나 ‘달러 리사이클링’은 미국 정부가 무역적자 구조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도록 하는 대신에 ‘부족하면 달러를 더욱 발행해서 해결하자’라는 병폐를 가져왔다.
달러의 지위를 보장하던 핵심 요인은 ‘달러-금환본위제’였다. 언제든지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면 금으로 교환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유지되던 것이 당시의 통화 체제였다. 그런데 미국이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위대한 사회’라는 타이틀로 사회 보장 제도를 대폭 확대하면서 정부의 적자 규모는 커졌고 아예 만성화되었다.
위태로운 미국 경제와 달리 유럽은 안정적인 수출로 경기가 회복되고 있었고 독일과 일본이 성장하면서 세계 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5%에서 27%로 크게 감소하였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넘치는 달러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였고, 금 가격이 계속해서 상승하자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려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미국의 금 보유고는 줄어들기 시작하였다.미국의 금 보유량 감소에 따른 불안감으로 금 가격이 재차 상승하자 미국은 1961년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런던 골드 풀 제도를 도입한다.
해당 제도는 금 가격이 온스당 35.2달러 이상으로 올라갈 경우, 금을 시장에 매각하여 가격을 안정화 시켜 금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참여국의 상이한 이해관계로 6년 만에 깨지게 된다. 당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미국이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강제적으로 수출한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출하였다.
즉, 미국이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만회하려는 목적으로 달러를 계속 발행하기 때문에 각 국가의 외환보유고 가치가 하락하여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교란한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 엄청나게 발행된 달러의 가치를 하락하게 만들거나 둘째, 달러의 금태환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평화와 도전”이란 제목의 특별 담화에서 그는 각 국가의 중앙은행이 보유한 달러에 대한 금태환을 즉각 중지한다고 발표하였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닉슨 쇼크 이후 달러의 기축통화 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세 가지 방법을 선택하였다. 첫 째, 국방력을 강화하여 군사력을 활용해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지금도 유효하며 미국의 국방비는 타 국가의 국방비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지출되고 있다.
2021년 기준 러시아와 중국. 그 외 몇 개 국가를 합한 것보다 미국의 국방비 지출이 더욱 크다. 두 번째는 달러의 패권을 위한 다자간 협의인 플라자 합의 였다. 마지막은 금 대신 원유를 통한 달러의 신뢰 회복이었다. ‘페트로 달러’라 불리는 이 정책은 원유를 오직 달러로만 구입할 수 있도록 강제하여 미국 달러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내부에 있었다. 당시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위원장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높은 금리 수준’을 유지했고, 달러가 은행 예금으로 몰리며 화폐 유통량이 감소하였다.
또, 레이거노믹스 정책에 의한 대규모 검세 정책과 정부 예산 절감으로 시중에 발행되는 달러마저 줄어들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보수적인 경제 정책은 강력한 물가 통제와 경제성장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나, 달러 유통량이 줄면서 예상치 못한 달러 가치 폭등이라는 결과도 불러왔다. 이 같은 달러 가치 상승은 미국 상품이 타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에 비해 높은 가격에 판매됨을 의미하였고,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외국 제품이 미국 시장을 점령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특히 주력 산업인 자동차 산업이 가장 크게 타격을 입었고, 미국 자동차 시장을 일본과 독일이 점령하게 된다.
레이건 대통령의 재임 시기인 1980년부터 1985년 사이에 주요 수입국인 영국의 파운드, 독일의 마르크, 일본의 엔화 대비 달러는 약 50% 가까이 고 평가 되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무역적자 규모가 1300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금리를 낮추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금리 인하 발표가 어렵게 극복한 인플레이션을 재발시킬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미국이 택한 방법은 G5 경제 선진국과의 합의를 통해 달러의 가치를 하락 시키고 일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 가치를 높여 무역적자 규모를 축소하는 것이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달러 대비 절상된 엔화를 무기로 미국의 자산을 무차별적으로 매입하였으나 급격히 추락한 수출경쟁력과 자국 버블 붕괴로 1990년 이후 현재까지 30년간 지속되는 불황을 겪고 있다.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달러의 기축통화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지만 여전히 달러는 가장 강력한 화폐이다.
미국 달러의 지위를 위협하는 유일한 경쟁자는 중국의 위안화이다. 중국은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무서운 속도로 미국의 최대 교역 국가가 되었다. 미국의 달러가 강해질수록, 중국의 위안화는 저렴 해졌고 엄청난 규모의 중국 제품이 미국에서 판매되었으며 그 결과, 중국의 무역수지는 폭발적으로 증가한 반면 미국은 대중 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를 기록하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달러 가치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중국은 넘치는 외환보유액을 이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고 2013년부터는 일대일로 전략을 펼치며 자신들이 보유한 달러를 원자재를 보유한 국가에게 대출해주고 있다. 중국이 일대일로 전략을 펼치는 이유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페트로 달러가 흔들릴 것을 대비하여 아직 달러가 건재할 때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중국은 차입 국가들이 차입금을 상환하지 못하더라도 원자재 소유권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향후 달러 가치가 하락하더라도 원자재 가격 인상을 통해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중국은 몇 년 전부터 위안화로 원유를 결제하는 방안을 시도하고 있다.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는 미국과 빼앗으려는 중국의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 국가의 통화 패권 싸움은 이제 디지털 화폐(CBDC)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CBDC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22년 3월 기준 1억 명이 넘는 디지털 위안화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도 중국보다는 늦은 감이 있지만 22년부터 정부 차원의 CBDC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미국은 오랜 기간 디지털 달러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였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의 독자적인 결제 시스템인 ‘CIPS’의 영향력 확대 및 민간 가상화폐 시장의 가파른 성장 등이 디지털 화폐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바뀌게 만들었다.
중국 위안화의 국제결제 비중이 2018년 1%에 불과하였지만, 22년 1월 기준 3.2%를 기록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점도 미국의 디지털 달러에 대한 연구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화폐는 국가의 신용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중국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에만 신뢰를 사고 다른 국가에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중국이 CBDC 시장에서 앞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디지털 위안화를 사용하는 국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여론조사 업체인 ‘퓨리서치’가 17개국을 대상으로 중국에 대한 평판을 조사한 결과, 17개국 중 15개 국가가 중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반중 정서가 확대되고, 중국 내부적으로도 여러 사회, 경제 문제가 산재한 만큼 위안화가 달러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한참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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